19년 전의 <배철수의 음악캠프> 오프닝 멘트를 듣다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10년 동안 제가 행복었나보다는 사실….
어떤 러시아 작가가 그랬죠.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고. 딴 재미에 푹 빠진 나무꾼은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른다고 했는데, 저는 제 일에 푹 빠져서 제 목소리와 말투가 변한 줄도 몰랐습니다.
언젠가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죠. 행복의 품사는 명사와 형용사라기보다, 동사와 접속사로 여겨진다고요. <배철수의 음악캠프>도 그렇습니다. 품사로 치면 동사, 그것도 현재진행형 동사입니다.
2009년 3월 19일 MBC-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 오프닝이다. 정확히 1년 전, 배철수는 지난 19년의 세월을 돌아보며 '행복'을 말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앞으로도 계속될 진행형이라 덧붙였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10년 3월 19일 6시. 배철수는 어떤 말로 음악캠프 20주년을 기념할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어떤 오프닝도 20년의 역사를 담기에 부족하다는 것. 말의 아름다움이 세월의 깊이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강산이 2번 변했을 20년, 배철수는 변함없이 6시를 지켰다. 그는 대한민국 최장수 팝 라디오 DJ가 됐고, '음악캠프'는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이 됐다. '롤링스톤즈'의 'satisfaction'은 대한민국 최장수 시그널로 기록됐고, '아메리칸 탑 40'는 최장수 코너로 자리잡았다.
또 어떤 역사가 있을까. '음악캠프' 정홍대 PD와 배순탁 음악작가를 만나 지난 20년의 세월을 물었다.
◆ "최초·최장·최다…역사의 순간들"
1990년 3월 19일,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첫 방송됐다. 그렇게 20년이 지났고, 지금까지 총 7,306회가 라디오 전파를 탔다. 그 사이 '음악캠프'는 유일한 팝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이 됐다. 34명의 제작진이 '음악캠프'를 거쳐가는 동안 배철수는 한 자리를 지켰고, 국내 최장수 팝 DJ로 기록됐다.
신선함이 무기였다. 최초로 100% 밴드 라이브 연주를 진행했고, 긴 곡 전문 코너 '수요일엔 긴 곡이 좋다'를 시도했다. '아메리칸 탑 40'을 통해 세계 팝의 흐름을 전했다. "광고 듣고 오겠습니다"란 멘트도 배철수가 처음 사용했다.
시간은 쌓여 역사가 됐다. '음악캠프'는 팝 아티스트가 가장 많이 찾은 프로그램이다. 해외 스타의 내한공연과 새 앨범 프로모션이 있을 때 마다 인터뷰를 진행했다. 시카고, 딥퍼플, 비욘세, 리한나 등 약 130여 명의 팝스타가 '음악캠프'를 찾았고 리키마틴은 전화를 포함 총 4번이나 '음악캠프'와 인터뷰를 가졌다.
지금까지 출연한 게스트만 봐도 레전드급이다. 특히 '사랑과 음악' 코너에 출연한 게스트는 남녀노소, 국적, 직업 불문으로 다양, 그 자체다. 실제로 지금까지 출연한 게스트를 보면 평론가와 교수부터 영화배우, 감독, 소설가, 레코드 가게 사장 등 매우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출연했다.
◆ "유일의 팝 전문 프로그램…상징적 의미"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팝은 전성시대였다. 김기덕, 김종환, 김광한 등의 팝 전문 DJ가 활개를 띄었고 팝 프로그램도 상당수 방송됐다. 하지만 머지않아 팝은 대중가요에 밀렸고 팝 전문 프로그램도 사라졌다. 전성기와 암흑기를 모두 거친 방송은 '음악캠프'가 유일하다. 팝 음악의 국내 현 주소라 할 만 하다.
배순탁 음악작가는 "팝 프로그램을 20년 동안 지켜왔다는 것에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요즘 국내 팝 시장이 죽었다는 우려를 많이 하는데 '음악캠프'를 보면 아직 가요 시장 속에서 팝음악을 들으려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청취율도 나쁘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 희망은 있다"고 긍정적으로 미래를 내다봤다.
초기의 색이 그대로 유지됐다는 점도 '음악캠프'의 강점이다. '음악캠프'는 아날로그 시스템을 고수한다. '라디오다운 라디오'를 만드는 것이 '음악캠프'의 모토다. 보이는 라디오를 거부하거나 CD를 고집하는 것도 TV가 아닌 라디오의 손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정홍대 PD는 "전통적인 라디오 기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라디오는 DJ 우선 시스템이다. DJ가 어떤 사연을 살리고 어떤 음악을 풀어내는지에 따라 라디오의 색깔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음악캠프'는 지금까지도 배철수가 선곡부터 방송까지 도맡아 진행한다. 앞으로도 아날로그 스타일을 유지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 "라디오다운 라디오…20년 이끈 원동력"
'음악캠프'를 20년 장수 프로그램으로 이끈 힘은 단연 DJ 배철수다. "배철수를 듣기 위해 음악캠프를 듣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제작진 역시 배철수를 첫 번째 손가락에 올렸다. 정홍대 PD는 "음악캠프는 곧 배철수"라고 말했고 배순탁 작가는 "자기관리가 철저한 이 시대의 진정한 DJ"라고 표현했다.
평소 배철수는 오후 5시 MBC에 도착한다. 방송 한시간 전에 리허설을 마치기 위해서다. 20년을 그렇게 해왔다. 정 PD는 "20년 동안 한 번도 결석한 적이 없고 매일 한시간 먼저 와 방송을 준비할 만큰 자기관리가 철저하다"며 "격없는 진행 스타일과 문화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음악캠프'를 더 빛나게 해준다"고 말했다.
선곡도 '음악캠프'의 자랑이다. '음악캠프'의 선곡은 꽤나 규칙적이다. '신청곡→음악작가→PD→DJ' 순의 단계는 필수며 신청곡 위주로 구성된다. 최근 인기곡은 일주일에 2번 정도, 유행이 지난 곡은 2주 정도의 텀을 두고 방송을 하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배순탁 작가는 "신청곡이 99% 비중을 차지한다. 대신 장르는 흥겹거나 분위기 있는 곡을 모두 섞고 시간대별로 올드팝과 최신곡을 나눠서 균형있게 방송한다"며 "최종 선곡은 전적으로 배철수 담당인데 듣기 좋은 음악과 들어야 할 음악을 잘 배분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대본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음악캠프'의 무게중심은 대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경옥 작가의 오프닝과 '철수의 오늘' 덕에 '음악캠프'는 적당히 예리하고 적당히 위트있는 방송이 될 수 있었다. 김 작가는 13년을 한결같이 손글씨로 대본을 쓰고 있다. 대본의 소탈한 멋스러움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정홍대 PD는 "사실 '음악캠프'에서 대본은 많은 양을 차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비중은 상당하다"며 "만약 '음악캠프'에 오프닝과 '철수의 오늘' 없었더라면 조금은 가벼워졌을지도 모르겠다. '음악캠프'의 무게를 잡아주는 것이 대본"이라고 밝혔다.
◆ "행복은 현재진행형…노력과 변화"
고인 물은 썩는다. '음악캠프'가 20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음악캠프'는 늘 개편을 해왔다. 하지만 전면 개편은 한 적이 없다. 게스트는 그대로인데 코너 주제만 바뀌는 식이다. 바뀐 듯 안바뀐 듯 자연스러운 변화를 추구한다.
배 작가는 "코너 교체 등의 변화는 꾸준히 있어왔다. 전면 개편은 고정팬들의 반발 때문에 힘든 부분이 있고 우리 입장에서도 최정예 멤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며 "최근에는 임진모를 올드 팝송으로, 김태훈을 트렌디 음악의 주제로 바꿔봤다. 게스트의 특징을 살리고 재미도 높이는 방법으로 좋은 평을 얻었다"고 전했다.
'음악캠프'가 공들이는 또 하나. 게스트 섭외다. 게스트에 차등을 두지는 않지만 의미 부여는 확실히 두는 편이다. 이를테면 특집 방송때는 서로 인연있는 인물을 섭외하거나 공개방송때는 해외 뮤지션을 초대하는 식이다. 게스트 섭외를 위해서는 삼고초려는 기본, 1년 이상의 시간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번 20주년 특별 게스트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 섭외는 1년의 구애 끝에 얻은 결과였다. 정홍대 PD는 "손석희 교수는 '음악캠프'의 전초인 '젊음의 음악캠프'를 진행한 적이 있고 MBC에서 배철수와 함께 존재감이 있는 DJ 중 한 명"이라며 "배철수와 손석희 교수가 서로 인터뷰를 진행하는 식으로 진행해 '음악캠프' 청취자에게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 "대중과 마니아의 줄다리기…20년 숙제"
'음악캠프'는 국내 유일의 팝 '전문' 프로그램이다. 20년 전부터 이어진 골수팬이 상당하다. 하지만 최근 고정팬들의 불만이 늘어났다. 메탈, 락, 인디 등의 음악 비중이 현저하게 줄었다는 것이다. "음악캠프가 제 색을 잃었다"는 혹평을 남기는 청취자도 있다.
정홍대 PD는 "늘 대중성과 전문성 사이에서 늘 고민한다. 일부 마니아 팬들은 메탈과 긴곡이 사라졌다고 '음악캠프'가 약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일부 청취자들은 '여전히 어렵다'고 평한다"며 "사실 정답은 없다. 신청곡 위주로 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늘 그 사이에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라고 털어놨다.
정체성이 내적인 고민이라면 '음악캠프'의 대외홍보 부족은 외적인 고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20년된 '음악캠프'를 모르는 청취자도 상당수다. 특히 10~20대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예비 청취자 확보를 위한 회심의 카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배철수가 연중행사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름의 전략(?)이다. 정 PD는 "외부 노출이 부족한 탓에 '음악캠프'를 모르는 사람이 꽤 많다"며 "배철수와 음악캠프의 색이 바래지지 않는 선에서 방송과 출판일을 하기로 정리했다. 가끔씩 임팩트만 줄 생각"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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